신립(砬) 장군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
음보(蔭補)로 선전관에 등용, 이어 경원(慶源)부사, 벽동(碧潼)군수를 지낸 후 사임하였다.
광해군의 문란 ·무도한 정치에 불만을 품고
1620(광해 12) 김류(金瑬)와 반정(反正)을 협의한 데 이어 이귀(李貴) ·최명길(崔鳴吉) 등과 거사를 모의하였다.
1622년 박원종(朴元宗)의 천거로 효성령(曉星嶺) 별장(別將)이 된 것을 기회로
다음해 반정군의 선봉장(先鋒將)으로 활약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어 공조참의 ·병조참지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조판서에 올라 3대장(大將)을 겸임하고 공서파(功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같은 해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비하였으며 우 ·좌의정을 거쳐
1640년 평성(平城) 부원군에 봉해졌고, 1642년(인조 20)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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