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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고씨 (長興 高氏) [장택고씨(長澤高氏)]

 시조(始祖) : 고중연(高仲연)


  고씨 가운데서 특히 장흥고씨가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전남 담양군 창평(昌平) 일대에 사는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이 유명하여 전남 지방에서는 이 일문(一門)을 창평고씨라 하며, 이를 호남사족(湖南四族)의 하나로 꼽고 있다.

 

 고씨의 본관은 원래 제주를 비롯하여 장흥, 개성, 횡성, 연안, 용담, 담양, 의령, 고봉, 옥구, 상당, 김화, 면산, 회령 안동 등 122본이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를 단본으로 하고 중시조 말로(末老)의 세손들이 9개의 파(派)로 나뉘어 있다.

  장흥고씨(長興高氏 혹은 장택고씨(長澤高氏))는 제주고씨 중시조 말로의 10세손 고중연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고중연은 고려말 남쪽으로는 왜구가 출몰하고 북쪽으로는 홍건적이 침입해 오는 고려 말기적 시대상황 속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그는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압록강을 넘어 2차 침입함으로써 개경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자 왕을 모시고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갔다. 이 때의 공이 인정되어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장흥백(長興伯)에 봉하여졌고 본관으로 장흥을 얻었다.

  고려말은 외부적으로는 대륙과 바다쪽에서 밀려오는 충격이 심하였고, 내부적으로는 정치적 격동과 사상적인 변화가 확대되므로써 급기야 왕조가 교체되었던 만큼 한 가문에도 변화가 없을 수 없었다. 더욱이 역성혁명의 왕조교체 속에서 당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권력자들과 유식한 지식인들은 사상과 명분에 비추어 신구왕조 중 어느 편에 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행동양식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조선조에 소위 班常(반상)이 결정되었던 예가 많다. 이러한 격동기에 살았던 파조 고중연의 후손들이 취했던 행동양식과 광주로 이거한 연유들을 알아보기 위해 파조부터 8세 고운에 이르기까지 족보를 중심으로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보듯이 고려조의 장흥고씨는 파조 고중연, 그리고 2세 합(合)과 3세 백안(伯顔)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과 급제 후 출사하였고 높은 관직에 올랐던 만큼 문벌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안과 그의 아들 협이 활동하던 시기에 역성혁명이 일어나 고려는 망하고 만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사류(士類)들은 두 부류로 나뉘게 된다. 권근과 정도전과 같이 개국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부류들이 있었던 반면, 많은 절의파 지식인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재야로 숨어들었다.

백안 또한 고려조의 은덕을 입었던 사람으로 구 왕조와의 의리를 지켜 전라도 영광(현재의 장성군 삼계면 지역)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아들인 4세 협(協)은 고려 왕족인 익원대군(益原大君) 소(玿)의사위로 부원군이었는데, 동년구교(同年舊交)인 태종이 이름을 신부(臣傅)로 고쳐주면서 신하 겸 스승으로 도와 달라고 하였어도 고려조에 대한 의리를 꺾지 않고 거절하였다. 또 협의 두 아들인 열(悅)과 직(直) 또한 태종이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출사(出仕)를 마다하고 은거하였던 만큼 여말선초의 3대(3세-5세)는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않고 초야에 묻히면서 전라도와 인연을 맺게 된다.

장흥고씨가 조선왕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상지(6세) 때로 보인다. 그의 관직이 창신교위 충좌위부사직에 올랐는데 조선조에 들어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마치고 다시 출사한 최초의 인물이다. 세종대왕과 같이 한씨의 외손으로 육촌계(六寸契)를 만들었는데 서열이 13위었다. 상지의 아들이자 고운의 아버지인 자검(7세) 또한 생원시에 합격하여 훈도를 지냈음을 보면 출사에 뜻이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백안이 전라도로 이거한 연유에 대해서 일설에는 파조 고중연의 부인이 왕씨인 연유로 역성혁명 후 피해를 입었고 그 여파가 손자인 백안에까지 지속되자 영광으로 이거하였다고 하지만 조선왕조에 이르러 지속적으로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있고, 멀지 않은 사간 내에 후손들이 스스럼없이 관직에 나아가고 있음을 볼 때 후대에 와전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이유보다는 위에서 얘기한대로 구 왕조의 유신(遺臣)으로 으리를 지키기 우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백안이 영광으로 온 후로 협(4세), 열(5세), 상지(6세)까지 4대에 걸쳐 이 곳에 터를 삼고 살았다. 지금도 백안과 협의 묘소는 장성군 삼계면 이암리에 있고, 열(悅)과 상지(尙志)의 묘소는 장성군 동화면 수연리에 소재하고 있다.

장흥고씨가 처음으로 광주에 자리를 잡은 것은 고중연의 7세손이고 고운의 아버지인 自儉이다. 자검은 영광에서 현재의 세거지인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압촌마을로 이거해 왔다. 이거 후 장흥고씨들은 선대의 절의적 전통과 혼인을 통한 인척의 연결고리를 바탕으로 이쪽의 토착사족들과 의기 투합할 수 있었고, 학문적 계통을 이어 받고 공유하면서 성장하여 갔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자검의 압촌동으로의 이거는 후손들에게 사회적 학문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고운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출사한 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함으로써 기묘명현으로 사림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닦을 수 있었다. 고운이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점차 이 지역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된 장흥고씨는 100여년간 5대를 연이어 문과 급제자가 10명에 이르러 이 지역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자검(自儉) 이후의 과거 합격자 및 관계 진출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현황은 16세기 - 17세기 입격자만을 말함)

성명
생몰/호
과거
관직
통혼
비고
8세
운(雲)
1479-1530
하천(霞川)
별시문과
1519 / 41세
형조좌랑
광산이씨
죽산안씨
 
9세
맹영

(孟英)

1504-1565
하헌(霞軒)
별시문과
1540 / 37세
부제학, 대사간
남평서씨
 
10세
경명

(敬命)

1533-1592
제봉(霽峯)
식년문과

(장원)
1558 / 26세

성균관전적
공조참의
울산김씨
 
경조

(敬祖)

1528-1596
구암(龜巖)
식년문과

(을과)
1561 / 34세

광주목사
사헌부지평
영광김씨
맹영의동생인 중영(仲英)의 子
11세
종후

(從厚)

1554-1593
준봉
별시문과

(병과)
1577 / 24세

임피현감
교서관정자
의녕남씨
철성이씨
 
인후

(因厚)

1561-1592
학봉(鶴峯)
증광문과

(병과)
1589 / 29세

학유
승문원정자
함평이씨
 
용후

(用厚)

1577-1640
청사(晴沙)
증광문과

(을과)
1606 / 30세

예조좌랑
병조좌랑
청해이씨
행주기씨
 
성후

(成厚)

1549-1602
죽촌(竹村)
별시문과

(병과)
1583 / 35세

전중어사
함양박씨
경조(敬祖)의 子
12세
부천

(傅川)

1578-1636
월봉(月峯)
알성문과

(병과)
1615 / 38세

교서관정자
풍천노씨
인후(因厚)의 子

한편 고운(高雲)은 문과 급제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온화하면서도 곧은 인품으로 후손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운 이후 후손들의 행적을 살펴보자.

  고운은 4남을 두었는데 큰 아들 맹영(1504-1565년)은 호가 하헌(霞軒)이다. 그는 1540년 경자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옥천군수를 지냈고 강원도관찰사, 호조참의를 거쳐 홍문과부제학과 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맹영(孟英)은 5남을 두었는데 그중 장남 敬命(1533-1592년)은 호가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으로 나라가 국난으로 위급할 때 가문의 의맥(義脈)을 살려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이다.

경명은 명종13년에 식년문고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호조좌랑, 사간원정원, 공조참의,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서 잠시 물러났을 때는 자연과 벗 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遊瑞石綠)을 저술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명은 60의 고령의 몸으로 두 아들과 함께 6천명의 의병을 일으키고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입을 받게 되었으니 도망치지 말고 무두 분연히 일어설 때”라고 시작되는 거의(擧義) 격문을 팔도에 돌려 왜병과 싸웠다. 그러나 금산전투에서 차남 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그는 송순의 문하인으로서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났고, 특히 시에 능해 임억령, 김성원, 정철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으로도 불리웠다. 현재 포충사에 배향되고 있다.

  고경명은 슬하에 5남을 두었는데 큰 아들 고종후(1554-1593년)는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호남파 5대시인으로 손꼽혔다. 그는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현령에 이르렀으며, 아버지와 동생(인후)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자 복수군을 기병하여 “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는 초토에 앓고 누워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있는 것이 참을 수가 없다.(중략)”라는 격문을 돌리면서 여러 갈래로 흐트러진 의병을 모아 영남으로 달려가 진주성을 지켰으나 성이 왜병에게 함락 당할 때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감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장사(三壯士)’라 일컬었다. 후에 종후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현재 광주 포충사와 진주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1561-1592년)는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학유(學諭)에 이르었다. 임란 때 아버지 경명이 군사를모으자 종군하여 권율 후하에 들어갔으며 금산전투에서결전하다 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의 포충사와 금산의 종용사에 배향되고 있다.

경명의 두 딸 노씨 부인과 안씨 부인도 정유재란 때 왜적을 꾸짖으며 칼을 안고 엎드려 순절하였으니 이들 일가의 절의는 높이살만하였다.

경명의 손자요, 종후의 아들인 고부립(傅立) 또한 정묘호란 때 의병장이었다. 선조는 경명일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광주에 사당을 짓게 하여 친히 포충사(褒忠祠)로 사액하고 경명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를 내렸다.

  고인후는 슬하에 4남을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 고부천(傅川 1578-1636)은 호가 월봉(月峯)이다.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624년 주문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바 있고, 관직으로는 교서관정자, 지제교,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24년에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였고 정묘호란 때는 피란 가는 동궁을 호종하기도하였다. 그는 학식이 높고 뛰어난 인물로서 사후에는 김상용, 최명길 등 당시 석학들이 만장을 쓰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월봉집(月峯集)이 있다.

이후 장흥고씨 후손들은 현재 광주시 남구 대촌동 압촌리, 지석리, 이장동 등을 세거지로 삼아 살아왔다. 이 곳은 포충사에서 대촌 출장소에 이르는 지역인데 고운의 광주이씨 부인 소생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압촌리는 참의공 자검이 자리 잡았고 하천 운이 성장하였던 곳으로 맹영, 경명, 종후 형제까지 대를 이어 살았다. 이장동은 원래 고려말에 제주양씨와 문화유씨가 들어와 정착하였는데 1600년쯤 제봉 고경명(10세손)의 4남인 유후(由厚)가 이거하면서 지금은 거의 고씨들이 살고 있다. 한편 광산구 하남 출장소 안청동 성산마을과 북구 장등동에 많이 살고 있는데 죽산안씨 부인 소생의 후손들이다.

창평에도 장흥고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바, 제봉선생과 함께 의병으로 참가하여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인후(因厚)의 처(함평 이씨, 이감사의 여(女), 고부천의 모(母))가 부군이 돌아가신 다음 친정마을인 창평으로 이거하면서부터라고 하는데, 창평면 삼천리, 유천리, 수곡리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
   고중연 : 일명 복림(福林)으로 자는 수일(壽一)이고 시호는 량헌(良獻)이다. 고려말의 인물로 1330년(충숙왕 17)에 문과에 입격하여 관직이 검교태위(檢校太尉), 군기감사(軍器監事),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고합(合) : 2세, 1350년(충정왕 2) 음서로 보승별장(保勝別將)을 했으며, 문과에 급제하여 지신사판상서(知申事判尙書)를 지냈다.
   고백안(伯顔) : 3세, 1371년(공민왕 12)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 참의(參議)를 지냈다. 전라도 영광으로 이거하였다.
   고협(協) : 4세, 고려조 익원대군 소(玿)의 사위로 병부시랑, 북부상서를 지냈다. 동년구교인 태종이 신부(臣傅)라는 이름을 사명하였고 호조참의를 제수하였으나 고려조의 의리를 지켜 받지 않았다.
   고열(悅) : 5세, 탄생할 때 고려 공양왕이 비단보자기에 미역을 싸고, 열(悅)자를 써서 축하하니 이름을 열(悅)로 하였다. 조선 태종이 호조참판을 제수하니 받지 아니 하였다.
   고상지 : 6세, 창신교위 충좌위부사직으로 좌통례로 증하였다.
   고자검(自儉) : 7세, 하천 고운(高雲)의 부친으로 자는 수약(守約)이며 생원시에 합격하여 훈도를 지냈으며, 중종조에 정사원종공신으로 녹하고 통정대부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고운(雲) : 8세, 호는 하천(霞川)으로 1479년(성종 10)에 태어나 중종 2년(1507년)에 등제하여 생원 진사가 되고, 1519년(동 14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형조좌랑에 이르렀다. 기묘사화 때에 화를 입어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눌재 박상 등과 시로써 수창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선종(善終)하였으며,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고운(雲) : 화가로 알려진 문신(文臣)으로 형조좌랑(刑曹左郞)을 지내고,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교를 맺어 을묘사화(乙卯士禍)에 연루되었다.
   고맹영(孟英) :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고경명(敬命) : 옥당(玉堂) 등 벼슬을 지낸 유학자이며, 동래부사(東萊府使)로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의병 6,000을 이끌고 금산(錦山)에 침입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그의 둘째 아들 고인후(因厚)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종후(從厚) : 고경명의 장자, 임피현감(臨陂縣監)으로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방어전에 참가,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전사하니, 이들 3인을 가리켜 ‘진주 3장사’라 하였다.
   선조는 고경명(敬命)에게 충렬공(忠烈公), 고종후(從厚)에게 효열공(孝烈公), 고인후(因厚)에게 의열공(毅烈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고용후(用厚) : 고경명의 셋째 아들,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는데, 문인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고회(晦) : 관란재(觀瀾齋), 숙종 때의 학자이다

 

 [ 상계 계보도(上契系譜圖) ]

 

 [ 집성촌(集姓村) ]
   광주시 남구 대촌동, 압촌리, 지석리, 이장동

 

 [ 본관지 연혁(本貫地沿革) ]
   전남 장흥(長興)

 

 [ 항렬표(行列表) ]

9세

10세

11세

12세

13세

○영(英)
경(敬)○
○후(厚)
부(傅)○
○두(斗)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세(世)○
응(應)○
만(萬)○
○겸(謙)
시(時)○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진(鎭)
제(濟)○
○주(柱)
광(光)○
재(在)○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석(錫)
영(永)○
병(秉)○
희(熙)
기(基)○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현(鉉)
동(洞)○
○식(植)
찬(燦)○

○규(奎)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종(鐘)○
○원(源)
동(東)○
○렬(烈)
균(均)○

 

 [ 인구(人口) ]
   19,316가구, 61,626명. (2000년 통계청)

 

 [ 관련 사이트 ]
   고씨중앙종문회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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