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5년(숙종 31) 생원이 되고, 17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721년(경종 1)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가 되고, 1725년(영조 1) 지평(持平)을 거쳐 동학겸교수(東學兼敎授) ·세자시강원겸보덕(世子侍講院兼輔德) ·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27년 이조참의가 되고, 실록청당상(實錄廳堂上)으로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도승지 ·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이어, 다음해 대사성 ·이조참판을 지냈다.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여 세운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풍릉부원군(豊陵府院君)에 책봉되었다. 병조판서 ·대제학 ·훈련대장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를 역임,
1730년 우의정에 올라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고, 1731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왕의 탕평책(蕩平策)에 적극 호응하여 불편부당한 인사관리를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영조(英祖)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학암집(鶴巖集)"이 있고, 글씨로는 "삼충사사적비(三忠祠事蹟碑)"
(淸州) "북백곽재우표(北伯郭再祐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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