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진욱(郁)은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우리나라 문묘에 배향된 진상(商)의 76세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박사로 보리공신에 오르고 진주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진주(晋州)를 본관으로 삼았다.
진욱(郁)의 둘째
아들 진계백(季伯)은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찬성사에 이르러 홍륜(洪淪) 최만생(崔萬生) 등과 국사를
의논하다가 마침내 그들이 모반할 것을 알고 제주도로 피신하여 정착함으로써
입도 시조가 되었다. 진계백의 손자 진계순(繼舜)의 아들 3형제대에서
큰아들 진인규(仁規)를 파조로 하는 판포파(板浦派), 둘째아들 진인한(仁漢)을
파조로 하는 명월파(明月派),
셋째아들 진의한(義漢)을 파조로 하는 납읍파(納邑派)로 분파되었다. 그런데 중세에
와서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 없으나 판포파와 납읍파는 풍기진씨(豊基秦氏)와
통합하여 진주진씨(晋州秦氏) 에서 분리되었고, 명월파만이 진주진씨의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명월파의 후손 진문종(文宗)에
의하면 입도 시조 계백으로부터 5세 수걸(守傑)까지의 묘소는 실전되고,
수걸의 아들 진언백(彦伯)의 묘비와 1719년에 세워진 언백의 손자
진흥준(興俊)의 묘비에 모두 본관이 진주로 되어 있고, 또 "전고문헌(典故文獻)"에
진계백의 본관이 진주로 되어 있는 사실을 들어 풍기진씨와는 관련이
없음을 주장하며 양파가 진주진씨로 복원할 것을 교섭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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