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지씨의 유래 시조 우사간를 지내신 지원부이다. 공은 고려 고종때 사람이며 공의 사위는 정숙이며 해주정씨시조이다. 충주지씨와의 현재 정확한 문헌이 없으며 혈연관꼐 불투명이다.
또 다른 문헌이 보면 충주지씨 시조 지경의 15대손라고 하지만 생년연대가 맞지 앉맞고 정확한 문헌이 없으며 신빙성이 없다,
공의 손자 충의공 지용도와 충무공 지용수는 공은 서북면(西北面) 상원수(上元帥)로 거제(巨濟) 고성(固城)에 처들어온 왜적(倭賊)을
격퇴하고 1356년 금병(金兵)의 침입을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다. 공민왕 7년에 내사시 문하평장사(內史寺
門下平章事)겸 이부랑 판혜덕부사(吏部郞 判惠德府事)가 되었고, 1364년 역적 최유(崔濡)가 요동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아우 충무공(忠武公)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나아가 물리쳤으며 경주부원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급제자 1명을 배출했다.
충의공 지용도의 6세손 세조(世祖) 때 충청절제사(忠淸節制使)로
단종(端宗)을 복위하려다 화(禍)를 입은 지정이다. 지정은 본래 이름은 지봉원이며 우의정 정분의 생질이다. 공은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그 외에도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
지홍문(池弘文)은 1907년 군대 해산령이 내리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강화갑곶(江華甲串)에서 일본군 1개 중대(中隊)를 격멸했으며,
만주(滿洲) 대학살 때 순국(殉國)한 지하영(池霞榮)과 함께 경주지씨(慶州池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경주지씨는 충의공 지용도의 8대손에서
절제공파, 참판공파, 현감공파, 처사공파, 진사공파, 감사공파, 거사공파와 충무공 지용수의 8대손 교수공파, 학생공파와 감찰공 지용현의 8대손
봉사공파 등이 10파가 분파하였다. 경주지씨 인구수는 1만3000여명이다.
이유
지원부들 역시 조상의 상계를 못 찾아 애 쓰고 있으며 원부의 아래로 대략 1~2대가 누단이 되어 찾고 있다고 합니다. 개인 노력 덕분으로
문제점을 찾았어요 현재 지원부(1250년대)기록되고 있습지만 제가 찾는중에 지원부의 사위 정숙라는 분은 생존연대가 1190년대라고
합니다. 이거 말이 맞지 않아요
그에 상당한 이유는 지원부의 딸이 해주정씨에게 출가 했는데 해주정씨의 족보 기록에
정숙(1190년로 기록이 전한답니다.) 따라서 장인인 지원부로 하여서 1170년 추정을 합니다. 그러면 지원부(1170년)의 사위인
정숙는 1190~1200년 사이에 출생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이를 것입니다.
또 지원부의 아들 지환은 지환의 사위 성공필은 생존연대
1260~1270년 사이에 출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환은 생존연대가 1270~1280년 사이에 출생합나고 합니다. 성공필의 손자
성여완은 1309년생 이라고 합니다.
이유이고 정확한 조사를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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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파(分派), 계파(系派) ] 절제공파, 참판공파, 현감공파, 처사공파, 진사공파, 감사공파, 거사공파. 교수공파 학생공파 봉사공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