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과에 급제하고    세조 때 포도부장에서 선전관을 
            거쳐    1482년(성종 13) 전주판관,    1485년 훈련원 판관,    1486년 경원도호부가,  
              1488년 첨지중추부사,    1489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1491년에는 다시 
            첨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후    1492년 온성부사,    1494년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499년(연산군 5) 조전절제사로 충절하였다.    1500년 회랑도(현재 
            중국 영토) 초무사가 되어 이 섬을 평정하였고,    1504년 좌상대장에 이로 
            한성부 좌윤이 되었으며,    1505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1506년 
            그 용맹을 인정받아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연산군이 사망했을 때는 
            6조와 더불어 장례위원이 되었다.    청백한 무장으로 독서를 즐겼으며, 
            준법정신이 투철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아, 당시 횡포가 심했던 우의정 
            홍윤성(洪允成)도 그의 기개에 감탄하였다 한다. 
               또 한성부 판윤으로 
            있을 때는 회산군(성종의 5남)이 법을 어겨 건축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책임자를 불러 문책하자 즉시 법에 맞도록 뜯고 줄이고 하여 용서를 
            빌었다 한다.    당시 세상에서는 맹문장이란 별칭으로 불리었는데, 
            아들이 행패를 부리자 살해하고도 태연하였다 한다.  일벌백계정신을 
            알 수 있다.    그가 병으로 위독할 때 문병 온 친구 
            김전(金詮)과 큰 바리로 이별주를 
            나누고 김전(金詮)이 대문을 나서기 전에 숨졌다 한다. 
              「조선 초기에 법이 가장 옥처럼 빛난 때는 전림에게 법이 대행됐을 때」라는 말이 후세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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