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정조 10)에 진사시와 문과를 통과하였다. 검열, 정언, 대사간, 황해도관찰사,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한성부판윤, 형조 ·호조 ·이조의 판서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24년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1827년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할 때 물러났으며 1833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792년에 경상도 암행어사로 나갔고, 1813년에 사은사로, 1829년에 문안사(問安使)로, 1830년에는 세손책봉(世孫册封)의 주청사(奏請使)로 청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숙종 중기 이후로는 남공철(南公轍) ·심상규(沈象奎) 등과 더불어 김조순(金祖淳)이 이끄는 인물군(人物群)에 속하였다.
지방을 다스리면서 많은 공을 세웠고 큰 무리없이 정부를 이끌면서도 개혁(改革)에 소극적인 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 고위 관인(官人)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헌종(憲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고, 저서로 "동어유집(桐漁遺集)", "해영일기(海營日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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