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평산의 유학자들이 도평산에서 의진을
결성할 때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는 돌격장이 되었다.
일제의 많은 병력의 공격으로 여러 곳의 의병들이 해산되었지만 그가
이끄는 부대만이 평산, 연안, 예성강 연안지역을 전전하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때로는 만주·노령 등지의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기도
하고 새로은 무기를 반입하여 사기를 진작하기도 하니 해서명장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서도 가장 무서운 인물로 지목당했다.
경술합방이 이루어지자 일제의 힘이 미치지 않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활약하였고, 1916년 10월에 군자금 조달을 위해 국내에 잠입,
영변에서 운산으로 금광으로 가는 송금차를 습격했다. 그 후 계속해서
국내에 잠입하여 헌병분견대 습격 등 활동을 하다가 임곡(林谷)의 밀고로
관전현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 일제 법정에서 그들의
침략불의를 매도하다 사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부인 우씨(禹氏)도
따라서 자결하였다. 중국 소아하 언덕 위 우부인의 묘전에 중국인들이
세운 열녀비가 있고, 해방 후 황해도민이 세운 그의 묘비에 <부사어의
부사어열, 천고경광 일문쌍절(夫死於義 婦死於烈, 千古耿光 一門雙節)>
이라는 비명이 새겨졌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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