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6년(인조 2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壯元), 16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교리(校理)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정랑(吏曹正郞),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1659년(효종 10)
승지(承旨)가 되었다.
다음해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이 일어나자 서인으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의 3년설(만 2년)을
누르고 기년설(만 1년)을 주장하여 서인이 승리하게 하고, 특히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문을 탄핵했다.
1661년 이조참판이 되고, 다음해 대제학에 특진 예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등을
거쳐 1672년 우의정이 되었다.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다음해 판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상복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김수흥과 함께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이 주장한 기년설(朞年說,
1년)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왕의 부름으로 다시 좌의정이 되고, 뒤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남인에 대한 강경, 온건파로 서인이 분열되자 송시열을
중심한 노론에 소속되어 소론들의 죄를 엄중히 다스렸으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다.
전서(篆書)를 잘썼다.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영평(永平)의 옥병서원(玉屛書院), 진도(珍島)의 봉암사(鳳巖祠), 영암(靈岩)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문곡집(文谷集)", 편서에 "송강행장(松江行狀)"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