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극혀(克孝)의 아들이다. 성혼(成渾)의 문인.
조선 선조 15년 진사가 되고
선조 23년 증광문과에
병과에 급제, 검열에 등요외어 상신 정철(鄭澈), 판서 김찬(金瓚)의
종사관으로 있었다. 병조 좌랑, 정언, 수찬, 응교등을 역임, 원수
권율(權栗)의 종사관으로 호남 지방을 왕래,
선조 31년 승지, 이해 겨을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귀국, 대사성을 거쳐 정주ㆍ상주
목사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 도승지ㆍ대사헌ㆍ형조판서를 지냈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의 한 사람으로 판돈령부사를 거쳐
예조ㆍ이조의 판서를 역임, 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으로 있었다.
인조 8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임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허락받았다.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글씨에 뛰어 났고, 그 서체는 이왕체를
본뜨고 전은 중체를 겸했으며, 시조는 유고로 오륜가 5편, 훈계 자손가
9편, 그밖에 '가곡원류' 등에 여러편이 있다.
강화의 충렬사,
양주의 석실서원, 상주의 서산서원, 안변의 옥동서원, 정주의 봉명서원에
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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