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향리(鄕吏)로 일정한 세력으로 광주 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대장군(大將軍)의 군직(軍職)을 가지고, 토성분정(土姓分定)에 의한 성씨를 안(安)씨로 스스로 가지고 광주(廣州)를 생활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본관(本貫)으로 삼아 온 것이다.

 

성씨정보의 담당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廣州安가로서 37대손으로 1936년생 安澤洙입니다.

귀 성씨정보사의 사이트를 찾아 공부하고자  廣州安氏 始祖記事를 보고 놀랐읍니다.

광주안씨의 시조를 설명하는 광주안씨 족보의 原文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始祖 諱 邦傑
仕高麗太祖爲大將軍封廣州君.
우리 광주안씨의 족보는 서기 1739. 1790. 1866. 1922. 1957. 1983년에 全體 姓孫을 收族하여 대동보, 족보로 6회에 걸쳐 간행하여 온 바.위의 시조기사로서 전체 성손이 周知하고 있으며. 풀어서 이해하는 시조의 出身은
고려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에 광주지방의 鄕吏로 일정한 세력으로 광주지방의 안정에 공적이 있어 大將軍의 軍職을 가지고, 土姓分定에 의한 성씨를 安씨로 스스로 가지고 廣州를 생활근거로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本貫으로 삼아온것입니다.廣州라는 주.군.현.명칭은 고려태조23년(서기940년)에 고쳐부른것은 역사서와 같습니다.다만, 廣州君이라는 君號는 후에 誇張하여 높여 부른것으로 이해 합니다.

이같은 우리 시조의 名諱는 족보以前의 후손의 碑文.行狀.遺事 등의 기록에도 一貫되게 기록하고, 大東韻府群玉(權文海 著.1534-1591)의 姓氏. 安. 廣州: 大將軍安邦傑之後邦傑以州吏顯 이라 하여 고려대장군으로 명기하고 그 출신은 광주의 州吏로 들어난(顯)사람임을 설명합니다.
우리는 시조이전의 족사나 系統은 알지못하며.또 이를 밝히지 아니하고 1.000년이 넘게 지나도록 다른 기사없이 광주안씨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자부심있게 살아왔읍니다.
그런데 귀 사이트에는 우리 광주안씨가 중국 당나라사람인 李瑗이 東으로 와 살면서 그 아들 3형제와 신라 경문왕 4년에 왜란에 전공을 이루어 성씨를 安으로 賜姓받고, 이름도 葉春을 邦傑로개명하고 廣州君을 封해 받았다니 이는전혀 알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고찰한 결과 竹山安氏의 所爲 [ 죽산안씨同源譜]라는 기록에 의지하여 죽산안씨의 족보인 1976년(丙辰)대동보와 1999년대동보를  열람하여   살펴보니 신라 경문왕 4년의 甲申倭亂(또는 外亂)은 삼국사기신라본기 경문왕조를 보아도 전혀 전쟁이나 倭寇의침범사실이 없으며 李瑗등의 사성,갱명,봉군 사실이 없음을 확인하니 이는 虛僞이며. 이를 죽산측에서 알고 1999년대동보에서는 신라헌덕왕 7년의 " 西邊州郡大飢盜賊蜂起出軍討平之"로 변용하여 설명하나, 이도 신라서울인 경주를 중심으로 볼때 서변주군이 개성이나 광주가 해당되지않고.신라시대에는 廣州라는 地名이 없었으므로 기록의 信賴는 없읍니다.
또, 죽산안씨의 시조는 1900년이전의 기록을 보면 濬. 漢平. 令儀등의 名諱로 나타나니 죽산안씨의 이름난 사람들인 安克仁. 安孟聃. 安允行. 安縝. 安경壽공들의 묘비문이나 諡狀에서 시조를 앞의 명휘로 각각 기록하고 있으며.

 앞의 대동운부군옥에서도 竹山의 시조는 "延興府院君安漢平之後"라고 안한평이 시조임을 설명하고 있읍니다.이를 미루어보면 죽산안씨의 시조 安邦俊은 1900년 이전에는 기록에 없읍니다.

이같은 疑心스러운 기록자료를 가지고 아무 관련이 없는 우리 광주안씨 시조를 李瑗의 둘째 아들이나, 안방준의 아우로 任意로 기록전파함은 우리광주안씨의 시조를 모독하며, 정체성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고찰한 설명은 귀 담당선생님께서 광주안씨의 족보(중앙도서관.정독도서관.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있음.)를 열람하거나 죽산안씨의 1976.1999년의 대동보. 기타 관련자료를 열람하시면 간단분명하게 확인 하실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 광안씨의 시조설명과 씨족사를 수정하여 올바른 族史가 되게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내용은 2006-12-18(월) 오후12:18에 안택수님이 보내 주신 자료입니다.


저는 廣州安가 37세손으로 1936생 安澤洙입니다.

아래 글은  족보의 폐단을 지적하는 역사사회학계의 글입니다.

[[조선 초기에 간행된 족보의 대부분은 족보간행을 위해 초안을 하고 관계 자료를 충실히 보완한 뒤 간행에 착수하여 내용에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의 족보들은 초안이나 관계 자료의 검토, 고증도 없이 자의적으로 기록하여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자의적인 수식이 가하여 졌음은 물론이며 조상을 극단적으로 미화하고, 선대의 벼슬을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조작하고, 심지어 명문 집안의 족보를 사고 팔거나 훔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대주의 사상에 젖어 시조의 유래를 중국에 두어 기자(기원전 1122년 우리나라에 왔다고 함)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고 하거나, 중국의 인물을 고증도 없이 조상 이라고 하는 식으로 족보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중화사상에 물들은 일반적인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족보를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가문의 격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야기된 것이었다.]]


귀 사이트 [廣州安씨 始祖] 기사가 착오되어 이를 수정하시기를 이미 요청하는 글을  드린바 있습니다.

관련 사항으로 설명 드립니다.

우리 광주 안씨 始祖 安邦傑공이 竹山安氏 始祖 安邦俊공의 아우로(弟) 표현한 귀 사이트의 기사는 잘못된 것입니다.

죽산 안씨 始祖 기록 事例를 말합니다.
ㅇ. 萬姓大同譜(1931.해남윤씨 소장. 한국인문과학원 편집 1998.)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竹山安氏: 令儀(追封尙書)  后  濬---時茂---世允---自裕....

ㅇ. 靑丘氏譜(1925. 宋允湜 상주거주. 朴海徹 밀양거주 편.)국립중앙도서관 소장.
   竹山安氏: 濬(少監)---時茂---世允---自裕...

ㅇ. 萬家譜( 해남윤씨종택 소장. 정문연.한국학대학원 安承俊 해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竹山安氏: 令儀(左僕射)  后  濬---時茂---世允---自裕

ㅇ. 萬姓譜(19c 필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竹山安氏: 社卿---克仁---仲老---望之---孟聃.

ㅇ. 朝鮮氏族統譜(1924.간 尹昌鉉 纂)의 安氏 기록도 銳意 考察하면 虛構를 發見함.

죽산안씨 1976년대동보. 1999년대동보 시조기록
   중국사람 李瑗이 신라 애장왕때 중국으로부터 東으로 와서 松嶽山아래 살면서 어떤 공적으로 姓을 安으로 賜姓받고 그 아들 3인이 신라 경문왕 4년 갑신외란에 전공이 있어 枝春이 邦俊. 葉春이 邦傑. 花春이 邦俠으로 각각 이름을 바꾸고, 竹山君. 廣州君. 竹城君으로 君號를 받고 竹山始祖. 廣州始祖다 운운하여 우리 廣州安氏의 始祖가 죽산안씨의 아우(弟)인 것으로 기록하니 전혀 根據없는 기록인 것입니다.

한편, 韓國人의 族譜(1977. 편찬위 편. 日新閣 刊). 韓國族譜大典(1989.3.15.한국씨족연구회편)에 죽산안씨대동보의 시조기록을 引用하여 한국의 安氏 都始祖는 중국사람 李瑗이라고 기록하여 중국의 歸化姓으로 말하니 이는 全的으로 틀린 기록입니다.

우리 廣州安氏 始祖는 高麗大將君 諱 邦傑이시고. 고려태조때에 광주지방의 유력한 향리로서 고려통일에 일정한 공적이 있어 土姓分定정책에 맞추어 安씨로 姓을 가지고 廣州를 본관으로 1,000여년을 이어온 씨족입니다. 우리는 족보.비문.행장.가장.등 모든 기록에 일관하여 시조를 명기하고 시조이전의 상계에 대하여는 규명이 없습니다.
 

저는 죽산안씨의 시조가 어느 분이건 전혀 관여치 아니하니 우리 광주안씨 시조가 죽산안씨와 관련이 없음을 말하며 그 根據는 이미 e-mail로 그 是正을 요청하였습니다.

귀사가 權威있는 族譜관련 연구와 홍보를 시행하는데 錯誤나 誤謬는 是正함이 마땅하니
[광주안씨 시조] 기록을 修正하시기 要請드립니다.


 위의 내용은 2006-12-25(월) 오후4:34에 안택수님이 보내 주신 자료입니다.

www.성씨정보.com = www.Surna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