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우왕 초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상주판관 등을 지내며 청백리(淸白吏)로 칭송을 받았다. 조선 건국 후인
1396년(태조 5) 봉상시소윤으로 있을 때 개국공신 정희계(鄭熙啓)의 시호를 성의 없이 지어 봉상박사 최견(崔蠲), 봉상시승 김분(金汾)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면되었다.
1399년(정종 1) 시사(侍史)·중승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보주사(甫州事)에 임명되었다.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를 거쳐 사간에 임명되었으나 개국공신 남재(南在)를 탄핵하였다가 유배되었다. 그 후 사면되어
1408년 경상도도관찰사를 지내던 중 부친이 병이 들자 사직하고 병구완을 하였다.
1411년 참지의정부사에 제수되고, 그해 하정부사가 되어 하정사 정탁(鄭擢)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사헌부대사헌·한성부윤·강원도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세종 즉위 후 개성유후사 유후를 지냈다.
전라도 장수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위패가 봉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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